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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믿음 바른신앙

Total 194건 8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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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July 09, 2023 신앙은 기다림일까?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은 후 우리의 삶은 우리가 생각했던 만큼 우리를 신비의 나라로 인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면서 마치 전례동화에 나오는 도깨비의 방망이처럼 우리의 소원과 요구를 기도하기만 하면 마냥 다 들어주시는 분이 예수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의 기도는 알라딘 램프의 지니처럼 우리의 요청에 모든 것을 응답해 주는 훌륭한 도구로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착각 속에서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과부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기도란 무조건 하나님께 때를 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적잖은 목회자들이 교인들에게 기도를 말하면서 기도를 하되 응답받을 때까지 끝까지 매달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신자들이 기도를 해야 함은 당연하나 자칫 잘못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으므로 정말 경계해야 하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방식과 가르침은 마치 이방 종교에서 행해지는 무속에 가까운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이방 종교는 자신들이 믿는 신들은 정성의 정도에 따라 기도의 응답이 좌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시간과 물질, 정성을 누가 더 많이 썼느냐에 따라 기도의 응답이 달라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만든 종교는 행위 우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방식으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당장 물질적 해결이 필요해서 기도할지라도 즉시 응답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에게 생각지도 않은 질병이 발병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병을 위해 기도하면 바로 하늘로부터 번개가 치듯 내 몸에서 전율이 일어나 내 병이 고쳐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어느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것을 봅니다. 여기에서 신자들은 하나님을 경험하고자 신비한 체험에 젖어 들려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믿는 신앙이 가짜가 아님을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의 바람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와 일하심을 기다려 보는 것입니다. 그 선하신 분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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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8
    오비도제일장로교회July 03, 2023 온유함이란 무엇일까?(2)
    모세는 광야 40년(출애굽한 이후 40년 아님)이라는 시간을 보내면서 수도 없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민족을 해방하고자 그 동안 준비하고 애쓴 것이 무엇이 잘 못되었던 것일까라고 말입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의 궁에서 왕자로 살면서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사명, 즉 노예의 고통 속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랬기에 오랜 시간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해방시키고자 준비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광야의 고독의 시간을 보내면서 한 순간도 잊지 못한 것이 ‘왜’, ‘무엇이 잘못된 것지?’라는 물음이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때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들로 인해 우리는 묻고 또 물은 경험을 수없이 하지 않습니까? 물론,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이 물음 조차 없을 수 있습니다. 설령 물었다고 하더라도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인간적인 시각에서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근본적인 답과 하나님에 대한 무한 신뢰를 하게 하는 믿음을 갖게 하고자 훈련하십니다. 드디어 모세가 40년이라는 시간을 지나 자신의 물음에 대해 찾은 그 답은 모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만든 것입니다. 모세는 자신이 왕자의 삶을 살고 있었을 때는 자신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적임자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40년의 광야의 시간이 지난 지금 모세는 알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 자신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누군가를 세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굳이 자신이 아니더라도 주님의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할 자, 즉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가 실패했을 때는 ‘왜’라는 질문밖에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임을 보게 되었을 때 알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 그는 조급할 필요도, 분노할 필요도, 염려할 필요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더 이상 자신의 처지를 부끄러워할 필요도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모세의 ‘온유함’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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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7
    오비도제일장로교회June 25, 2023 성경적 '온유함'이란 무엇일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 많이 회자되고 있는 성품 가운데 으뜸인 것이 있다면 ‘온유함’일 것입니다. 물론 이 온유함은 교인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부러워하는 사람됨의 성품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의 성품 가운데 ‘온유함’을 갖고자 애쓰는 이들이 많습니다. 온유한 성품을 지닌 성경인물을 뽑으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인들은 한결같이 ‘모세’를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의 모습을 보면 과연 ‘온유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모세도 죽도록 고생하다가 막판에 가서 성질 한 번 부린 것 때문에 그가 그토록 바라보고 싶었던, 밟아보고 싶었던 가나안 땅을 자신의 눈 앞에 두고 가보지 못한 채 인생의 끝을 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은 모세를 일컬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가 모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 그렇다면 우리가 생각하는 ‘온유’와 주께서 말씀하시는 ‘온유’의 의미가 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까지 저도 온유라는 말을 그저 ‘부드러움’, ‘따뜻함’, ‘예의바름’ 등의 신사적인 모습을 연상하는 뜻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저의 머리 속에서 성경이 말하는 ‘온유’가 그런 뜻이 아닐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해 봤습니다. 모세는 40세까지 아주 혈기왕성하게 살다가 그로 인해 큰 사고(?)쳐서 그의 인생 중반기 40년을 광야에서 독수공방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광야에서 살면 거친 사람들이 온유한 사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 바뀌었습니까? 광야의 삶은 나를 더 힘겹고 여유없이 만들어 갑니다. 광야에는 친구도 없습니다. 그 누구도 나랑 대화해 주지 않습니다. 광야에서 부드러워진다고요? ‘천만의 만만의 콩떡’입니다. 부드러워지기는커녕 더 거칠어집니다. 모세는 40년동안 광야에서 한 가지 질문만 주께 묻고 또 물었을 것입니다. 왜 자신의 계획이 실패하고 패배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그 40년 동안의 물음 끝에 그가 찾게 된 그 답이 그를 ‘온유한 자’로 바꿔 놓은 것입니다. 그 답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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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6
    오비도제일장로교회June 19, 2023 가정교육인가, 위탁교육인가?(2)
    참으로 D.L. 무디로부터 시작된 교회학교가 지난 그리스도교의 100여년 역사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신앙중심을 잃어버리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산업화로 인해 가정의 분해와 가족제도의 변화로 그나마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 교회학교 시스템이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에 대해 부인하고 싶은 맘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수에 있어 조금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신앙교육을 주일학교 시스템에만 의지한 지 거반 100여년이 지나면서 우리는 성경에서 보여주는 부모들의 믿음전수라는 것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자녀들에게 대물림해야 한다는 책임감은 둘째치고 아예 자녀 신앙교육의 방관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자녀 신앙교육의 부재와 문제점을 교회와 사역자들에게 전가하는 것으로 회피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교회는 어린이 사역자들을 통해 교회의 부흥을 일끌어 내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지배적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일학교, 자녀 신앙교육의 무너짐은 교회의 시스템 부재와 역할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믿음 전수라는 대전제를 잃어버린 자녀 신앙교육의 무너짐이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부흥하고 성장하려면 교회 주일학교 시스템의 재정비가 아니라 가정에서 신앙교육의 회복이 먼저 시작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들이 바른 신앙과 믿음으로 배우고 학습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만 나오면, 일주일에 한 번 예배만 하면 그리스도교에 대해서 다 안다고 착각에 빠집니다. 이런 무의식 속에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와 혼합주의, 동성애, 무엇보다 지금은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 인본주의 신앙에 빠져 잘못된 그리스도교를 만들어 버립니다. 현재 올랜도교회와 연합해서 2023년 VBS를 진행중입니다. 자녀들에게 교회에서 성경교육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정에서 부모의 신앙교육이 우선이어야 함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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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5
    오비도제일장로교회June 12, 2023 가정교육인가 위탁교육인가?
    교회사적으로 주일학교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120여년전 D.L.무디라는 전도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 달리 해석되어질 수 있기에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라고 말씀을 먼저 전제해서 전합니다. 18세기말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우리가 아는 산업혁명이라는 것이 유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이 변혁의 바람은 지금까지도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여파가 19세기와 20세기 초반 미대륙을 휩쓸게 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문제를 하나 야기하게 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기전까지 인간들의 삶은 농경사회였습니다. 농경사회라는 것은 바로 한 가정과 마을을 중심으로 인간의 삶이 이루어졌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산업혁명이 인간들의 삶의 중심과 삶의 형태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빠른 성장과 그로 인해 필요인력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사회가 되다 보니 가정이 변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큰 변화가 바로 가족의 해체였습니다. 가정의 부모들이 산업현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아이들까지도 산업현장에 뛰어들어야만 했던 시기가 온 것입니다. 이런 시대가 되면서 종전의 교회의 모습도 많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주7일을 근무하게 되는 노동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가정의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로부터, 부모의 교육으로부터 점차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가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거리로 나와 돌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시기에 침례교인이었던 평신도 설교자 무디라는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길거리를 방황하던 아이들과 오고 갈 때 없는 아이들을 위한 교회의 방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일학교의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전통적으로 교회 안에서 한 가정이 함게 예배하던 모습이 없어지고 세대별로 분리가 되어 예배하는 교회의 모습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의 모습이 100여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가정의 신앙교육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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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4
    오비도제일장로교회June 05, 2023 고백인가, 주문인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신자들이 예배나 모임에서 함께 고백하는 내용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공예배시 주로 고백되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입니다. 근데 이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라는 단어가 조금 잘못되었다는 것은 예전부터 지적되어져 나오는 말입니다. 사도신경이라고 번역되기 보다 ‘사도신조’라고 번역되는 것이 더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주기도문은 ‘주께서 가리치신 기도’라고 해야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이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를 만들어 자세하게 설명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오늘날 교회 안의 신자들에게 잘못 이해되어 고백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마치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이 예배나 어떤 모임의 시작과 끝을 맺는 열쇠와 마침 도장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이는 정말 그리스도교를 우상화하고 미신화하는 극대치를 보여주는 경우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사도신경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고 고백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을 먼저 드리면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이라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주문을 외우거나 외치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의 우주적인 교회가 고백하는 참 신앙의 핵심을 함께 고백하는 고백의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신경을 예배와 모임시 고백할 때는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한 믿음을 고백하는 의미를 가지고 정확하게 그리스도교의 신앙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며 입으로 소리내어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마다 이것이 참된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기도문도 같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은 우리의 기도가 잘못되거나 우상화되지 않도록 모범을 보여주시기 위해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말 그대로 기도의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는 암송한다거나 외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다’라는 표현을 써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의미를 기억하며 기도해야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신경과 주기도문은 ‘주문’이 아니라 ‘고백’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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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3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y 31, 2023 베드로의 닭이란?
    제가 사는 지역의 이름은 ‘Oviedo(오비도)’라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의 유래는 아마도 스페인의 어느 시골지역의 이름인 듯합니다. 예전 미국이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이었던 시절,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점령하고 있을 당시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 오비도라는 지역의 심볼이 특이합니다. 바로 ‘닭’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닭이라고 하면 ‘Chicken’을 떠올릴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는 ‘Rooster’라고 말합니다. 이 지역에서 꽤 오래 살았지만 왜 오비도의 심볼이 닭인지는 잘 모릅니다. 한 가지 추측 가능한 것은 이 오비도 지역은 예전부터 야생에 방사시켜서 키우는 닭들이 많이 돌아다닙니다. 심지어 오비도 다운타운을 가 보면 은행이나 가게 주인들이 길고 넓은 판대기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길고 넓은 판대기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거리를 돌아 다니는 닭들이 때지어 은행이나 가게 건물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구약 성경 66권 가운데 닭이 등장하는 성경이 딱 한 군데가 있습니다. 바로 복음서에서 베드로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때 닭이 유일무일하게 한 번 나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베드로와 닭을 연관시켜 베드로의 닭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미국 교회들 가운데, 특히 시골교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 교회의 종탑 위해 닭의 형상을 한 모형물이 풍향계와 함께 올려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마도 초대교회 믿음의 선조들이 닭 울음 소리를 들으며 베드로의 회개를 생각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사는 이 지역의 상징물이 닭이 의미있어 보입니다. 현재 저는 우리교회의 이름을 변경하고자 고민중에 있습니다. 아마 ‘오비도제일장로교회’로 변경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지역에서 한인교회로써는 첫 장로교회이기에 지역이름과 함께 오비도제일장로교회로 변경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교회의 심볼도 바꾸고자 합니다. 바로 베드로의 닭을 상징화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지역을 회개와 한인 신앙 각성의 전초기지로 기도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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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2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y 21, 2023 왜 광야를 하나님과의 동행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다바르’라는 히브리어가 있습니다. 바로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다바르라는 단어에 히브리어 전치사인 ‘민’이라는 말을 붙이면 ‘미드바르’라는 말이 됩니다. 여기서 전치사 ‘민’은 ‘~로부터’ 혹은 ‘~와 함께’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미드바르’는 ‘말씀으로부터’ 혹은 ‘말씀과 함께’라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난 것은 히브리어 ‘미드바르’라는 말의 의미는 사실 ‘광야’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히브리어의 놀라운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왜 성경의 인물들이 광야의 삶을 살았냐라는 이유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신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다가 광야로 도망치게 됩니다. 광야는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입니다. 그 어떤 것도 의지 할 수 없는, 그 어느 누구도 함께 하지 않는 곳이 바로 광야, ‘미드바르’입니다. 다윗도 그가 왕이 되기 전 광야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도 공생의 사역을 광야의 삶을 시작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고자 사용하는 종들을 반드시 광야로 내모십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말씀이 함께 하는 그 곳에서, 말씀으로부터 오는 그 곳에서 그 분의 종의 모습으로 다듬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이들과 그 광야에서 함께 하시길, 그곳에서 가장 좋은 것을 보게 되길, 그곳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하게 되길 훈련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광야의 동행함을 통해 이기적이고 불순종만 저지르는 우리를 온유한 자로 다듬으십니다. 광야에서는 오직 말씀만이 보입니다. 광야에서는 오직 말씀만이 들립니다. 혹여 여러분의 삶 가운데 광야의 삶,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정말 복된 삶이 시작되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광야만이 우리를 말씀 자체이신 우리 주 예수께 이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우리의 창조주이시자 구속주 하나님, 예수를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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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1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y 16, 2023 왜 교회는 성도의 어머니인가?
    오늘은 한국교회와 이민교회들이 ‘어버이주일’ 혹은 ‘어머니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물론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적 관점에서 주일예배를 특정한 예배 형태의 모임으로 모이는 것은 그리 좋은 모습은 아닙니다. 자칫 잘못된 예배로 흘러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한 분 하나님께만 행하는 성도들의 모임이기 때문에 인간적 기념예배를 한다는 것 자체가 불신앙일 수 있습니다. 설령 그러한 의도로 예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모임 자체로 불경스러운 것이 될 수 있기에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 행해지는 특정 예배의 형태는 지양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오늘 ‘교회’에 대한 생각을 해 보고자 합니다. 교회에 대해 말한다고 하면 ‘교회론’에 대해 떠올리는 경우가 일반적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지금 ‘교회론’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주께서 교회를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자고 합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를 떠올릴 때 먼저 장소적 개념으로 건물을 떠올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일반적인 교회론에서 말하는 교회란 믿는 자들의 무리(모임)를 교회라고도 하지만, 또한 유형적인 의미에서 건물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구성원, 즉 조직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기독교 강요’를 쓴 칼빈은 교회를 일컬어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말합니다.   교회를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들이 가정의 어머니로부터 사랑과 양육, 여러 가지 성장에 필요한 동력들을 공급받으며 자라나는 것처럼 칼빈 역시도 교회가 성도들을 말씀과 기도로 양육함은 믈론, 여러 가지 영, 육적인 것을 공급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교회를 떠나서는 그 어떤 천국의 값진 보화도 누릴 수도 없으며 주께로부터 오는 각종 좋은 은사와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도는 교회를 어머니로 여기며 사랑과 존경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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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80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30, 2023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일까?
    ‘믿는다’라는 말은 정의하기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사형인 ‘믿는다’라는 말이 명사형인 ‘믿음’으로 바뀔 때는 단순히 ‘믿는다’라는 의미를 넘어 확신을 전제로 하는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가 ‘믿는다’라고 할 때는 그 믿음의 실체를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라는 것도 실체가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상 사람들이 믿는 믿음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믿음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가령 불신자들이 우상을 믿는다고 할 때 그것은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신자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는 미신이 아니라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그 믿는 대상의 실체과 진실성에 기반을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은 과연 불신자들은 그들이 믿는 우상이 가짜라고 인지하고 믿느냐라는 것입니다. 결코 그들이 믿는 우상을 가짜라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세상 사람들의 믿음이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바로 그 믿음의 대상의 실존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상을 믿는 이들의 믿음을 ‘신앙’이라고 말하기 보다 ‘미신’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실체하지 않는 것들을 자신들의 고집으로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잘 알지도 못한 것을 믿어주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미신’이 세상 종교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도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어떨 때 말입니까?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신앙할 때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인 예수를 알지 못하면서 기도함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은 자비하셔서 우리의 잘 알지 못하고 그에게 나아게 기도할 때도 우리의 기도를 받으십니다. 하지만 그것도 초보 단계의 믿음생활 때나 그럴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자라가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믿음도 자라가야 하되 그리스도를 아는 고상한 지식까지 가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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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9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23, 2023 신본주의인가, 인본주의인가?
    오늘날 교회는 인간 중심적 예배의 극치를 보여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유투브 영상을 보다가 한국에서는 잘 알려진 목사님의 로마서 설교 앞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로마서 1장 1절에 나타난 바울이 자신을 소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목사님의 말씀에 의하면 오늘날 한국 교회가 잃어버린 것이 바로 바울이 자신을 향해 말한 ‘종’이라는 개념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이 영상에서 이 목사님은 초대교회의 ‘종’의 개념을 일반적인 집안의 ‘일군’이라기 보다 ‘노예’라는 뜻임을 강조하며 노예의 특성을 들어 오늘날 교회와 교인들이 ‘노예’로서의 낮은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인본주의적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분이 사역하는 교회는 한국에서 보수주의 신학의 최고 선봉에 서 있다고 하는 교단의 목사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설교하는 것을 보며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습니다.   왜 제가 이 설교를 인본주의적 설교라고 말씀드리냐면 로마서 1장 1절에서 바울이 자신을 향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종’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다는 것을 간과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로마서 편지를 일면식도 없는 로마교회의 교인들에게 보내면서 자신을 ‘종’으로 소개할 때는 자신의 겸손과 낮은 자세를 표현한다기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여러 방면으로 들었던 이들에게 바울이 누군가의 ‘종’, 즉 ‘노예’가 될 정도로 자신이 믿고 섬기는 대상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겸손을 드러내기 위해서 ‘종’이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노예’가 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정말로 위대하고 놀라우신 분이라는 것을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서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바로 2절에서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인들에게 바로 선포해야 신본주의 말씀선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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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16, 2023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회개해야만 하는가?
    많은 이들이 어떤 집회, 가령 기도원에 가서 혹은 심령수련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에, 강사들의 초청을 듣게 됩니다. 기도 시간의 강사들은 어김없이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주 앞에 다 내어 놓고 회개의 기도를 강조합니다. 이런 부흥강사나 기도회 진행자들의 요청은 일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도의 시간 때마다 지난 날의 죄에 대한 반복적 회개를 기도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과거 자신이 예수를 믿지 않던 시절 지었던 여러 가지 추하고 더러운 죄를 다시 기억하면 용서해 주시길, 자신의 죄와 지난 날 과오를 씻어주시길 또 꺼내어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을 봅니다. 물론 이런 이들의 기도가 틀렸다고 단정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지난 날의 죄와 허물을 참으로 회개하지 않고도 회개한 것처럼 뻔뻔스럽게 잊고 사는 것보다야 백배, 천배 나은 일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보니 믿음생활을 하는 신자들이 가지는 혼돈은 지난 날 회개한 죄들에 대해서 우리는 오늘도 여전히 회개 기도를 해야 하는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을 드린다면 아니다라고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지난 날 불순종의 죄인으로 살 때 지었던 죄와 예수를 믿지 않고 거부했던 반역을, 또한 우리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과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순간 다 씻어집니다. 또한 나의 원죄뿐만 아니라 내가 이날 이때까지 살면서 지었던 자범죄도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다 사함을 얻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의 원죄인 근원적인 죄, 즉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죄과에 대한 회개는 이미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사망에서 생명으로 이전되기 때문에 반복적인 회개를 요구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구원받은 이후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죄성에 의해 저지르게 되는 죄에 대한 회개는 날마다 우리는 기도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우리를 깨끗게 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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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April 03, 2023 구약에서 말하는 복이란 정말 물질과 기복을 가리키는 것인가?
    누군가가 저에게 만약 무인도에 갇히게 된다면 그리고 그곳에 책을 딱 세가지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다면 어떤 책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주저없이 첫 번째는 ‘성경’이요. 두 번째는 칼빈의 ‘기독교강요’요. 마지막 세 번째는 서철원 박사의 ‘교의신학전집’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 가지의 책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죽을 때까지 품에 품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의 책의 내용을 토시하나 빼지 않고 다 외우고 싶은 간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기독교강요 제2권 10장의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그리고 목회자들이 언제부턴가 기복적인 신앙관으로 그리고 현세주의 신앙생활을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강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현상은 결국 강대상을 심하게 오염시켰으며 설교자들의 설교내용을 펠라기우스적 설교로 왜곡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 주님의 십자가 대속과 그의 구속사역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인간의 도덕적인 삶에만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회자들이 성경을, 신학을 진지하게 연구함 없다보니 쉽게 성경을 내 맘대로 해석하여 적용할 수 있는 QT에 빠졌으며 마치 QT가 진정한 성경해석인냥 교인들을 오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지면을 들어 감히 말씀드리건데, 신학과 성경의 역사적 배경없이 고안된 QT는 결국 사탄의 장난에 빠질 수밖에 없음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자들이 성경을 QT하면서 가장 큰 함정에 빠지는 것이 구약에 나타난 복의 개념입니다. 이 복의 개념은 특히 오늘날 현 신자들의 믿음의 척도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종교개혁당시에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그의 책, 기독교강요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복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현세의 삶에 대한 즐거움에 제한시키지 않고 그들을 들어 올려 불멸에 대한 소망으로 나아가게 한다.” 즉 진정한 복음설교는 기복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선포함이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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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6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7, 2023 안식일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다시 읽어내려 가면서 오늘날 교회가 정말 많이 비뚤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비뚤어졌느냐고 묻는 분이 계신다면 조금의 망설임없이 어쩌면 우리는 다시 돌이키지 못할지 모릅니다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입니다. 물론 이 땅의 수많은 목회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과연 몇 분이나 제 말에 동의를 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가 느끼는 오늘날 교회의 타락과 변질, 비뚤어짐은 이제는 더 이상 참과 거짓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시기가 된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에 쌓이게 합니다.   얼마전부터 메시아닉 쥬(예수를 믿는 유대인들)들이 다시 그리스도교(기독교)에 관심을 받으면서 한국은 물론 세계 그리스도교 사이에서 세대주의 신학을 바탕으로한 왜곡된 신학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저도 한 때는 이 신학사상에 빠진 적이 있는 터라 이 사상의 무서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이들은 현재 개혁신학을 Replacement Theology라고 말하며 예수님 승천 후 세워진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는 잘못된 신학이라고 말합니다. 저도 성경을 많이 읽는다고 자부하는 편이라 처음 이 신학사상에 대해 접했을 때 뭔가 새로운 신학이론인가 하여 그들의 사상을 추종했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들이 주장하는 구약의 여러 절기와 안식일 개념이 이 땅에 참된 우리의 구속주로 오신 예수님과 충돌된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공부한 것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과 칼빈주의 신학이었습니다. 이 지면을 통해 일일이 다 언급하기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그때 그때 생각 날 때마다 하나하나 풀어가려 합니다. 그 가운데 오늘날 안식일의 개념이 얼마나 비뚤어져 있는지를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다시 읽으며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주일의 개념이 성경에 근거도 없는 안식일로 둔갑하여 참된 안식일과 안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또한 참된 안식을 지키고 누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작금의 교회는 가르쳐주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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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19, 2023 예수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 목회자의 삶을 살고 교회에서 목회자로 사역하면서 지금까지 가장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이 내가 가르치는 교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인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입니다. 오늘 날 교회의 신자들은 물론, 목회자 역시도 누군가가 교회에 나와 있기만 하면 구원받았다고 믿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목회자는 그런 망상을 신앙으로 바꾸고 싶어 합니다. 왜냐하면 어렵게 교회를 나온 자들에게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갑니다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말할 때는 반드시 전제가 필요합니다. 바로 당신이 죄인입니다라는 것이 전제가 되어져야 하고 그렇기에 지옥을 피할 수 없다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도 다 차치하더라도 자신들이 교회에 나와서 어느 시간이 흐르면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신을 믿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예수신을 믿고 있는 것이냐고 말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합니다. 예수를 믿고 있는지, 예수신을 믿고 있는지는 그가 예수에 대해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내가 내 맘대로 생각하고 믿는 것을 신앙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엄연히 우리의 신앙의 표준인 성경을 중심으로 믿음생활을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성경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오직 예수가 그리스도이심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삶을 어떻게 선하게 살지를 말하는 자들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진리만을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그 말씀을 듣는 자들 가운데 유기된 자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이 땅에서 복음을 듣지 못했노라고 핑계대지 못하게 해야 함도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죽음을 보며 마음이 많이 쓰라립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신앙을 알기 때문입니다. 참된 믿음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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