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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8, 2022 ‘충성’이 ‘총성’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이 거진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양쪽 다 사상자들이 많이 났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민간인 희생자도 많이 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더 아픕니다. 왜 이 시대에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왜 무고한 생명들이 죽어야만 하는지, 우크라이나도 그렇지만, 한편 러시아 군의 이야기를 들으면 러시아 군의 입장에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지울 수 없습니다. 훈련이라고 생각하고 참가했는데, 그냥 훈련이라 우크라이나에 가면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환영해 줄 것이라는 푸틴의 거짓말에 속한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던 러시아 젊은 병사들의 이야기도 안타깝기는 매 한 가지입니다.   기왕 전쟁이야기로 오늘 목회칼럼을 시작했으니 군대에서 비롯된 말로 오늘 헌신예배하는 남선교회에게 담임목사로서의 권면을 드리고자 합니다. 아마도 군대를 다녀오신 분들은 ‘총대를 메다’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 말은 굳이 남성으로서 군대를 갔다오지 않았더라도 우리 한국 사회에서 흔히 쓰이는 말이기 때문에 잘 아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지금은 군대에서 지급받는 개인화기(소총)이 작고 가볍지만, 과거에는 크고 무거웠습니다. 한국전쟁 당시만 하더라도 개인화기였던 M1 소총은 지금의 M16(미제)나 K2 소총보다 더 무거웠고, 힘이 약한 사람은 들기도 힘겨울 정도였습니다. 또한 구한말 개화기 이전의 군대에는 무기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군인에게 총이 지급된 것이 아니라 사격술이 뛰어난 군인이나 정예 부대에만 지급되었다. 일반 군인의 무기는 칼이나 창, 또는 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투가 일어나면 우선 화기를 다루는 사수인 총대를 멘 사람부터 표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군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군대에서 총대를 멘다는 것은 힘겹기도 했지만, 적의 표적이 되어서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소총병이 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총대를 메다’는 것이 아무도 나서서 맡기를 꺼리는 공동의 일에 대표를 맡거나 앞장을 선다는 뜻으로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생각지도 않게 상대편으로부터 미움이나 제거의 대상이 되어 불이익을 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말이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로 와닿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유가 좋은 일에 이 말을 쓴 것이 아니라 좋지 못한 일이 있을 때마다 누군가가 나서면서 이 말을 하다보니 그리 느껴지지 시작한 것 같습니다. 어느 때부턴가 교회 안에서도 무슨 일을 하다가 좋지 못한 일이 생기거나 어떤 일을 해결해야 할 때 무심코 ‘총대를 메겠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랑하는 남선교회 회원들에게 권면드립니다. 교회 일은 총대를 메는 것이 아니라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총대메고 총성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늘 특송처럼 십자가메고 충성을 다하는 우리교회 남선교회가 되시길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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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1, 2022 룻기서
    성경 룻기는 구약성경 가운데 에스더와 함께 여성의 이름이 제목이 된 성경 중에 하나이다. 룻기를 감히 진흙 속에서 발견되는 진주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룻기의 배경이 사시기이기 때문이다. 칠흑같은 어둠속에 한줄기 빛과 같은 말씀이 룻기이다. 마치 어두움 속에서 빛이 있으라 하신 그 하나님께서 어두운 세상에 성육신하시듯, 룻기는 장차 이 땅에 구세주로 오실 메시야의 조상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줌으로 ‘은혜’를 계속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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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March 21, 2022 찬양대인가, 성가대인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대부분이 예배시에 특별순서로써 예배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찬양’을 하는‘찬양대(讚揚隊)’를 성가대(聖歌隊)'로 지칭하고 있는데, 이는‘찬양대’로 바로 잡아야 한다. ‘성가’는 교회 밖의 속된 노래와 구별되는 의미는 있으나, 찬양의 참 의미가 교회와 교회 밖을 구분하여 성가(聖歌)가 되고 속가(俗歌)가 되는 것으로 호칭되는 것은 아니다. ‘찬양’은 영광과 존귀를 하나님께 돌리는 것으로써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섭리사역에 대한 응답으로써 하나님께 돌리는 참된 경건의 주된 요소인 것이다. 부연하면, 찬양은 창조, 타락, 성육신, 십자가 고난과 죽으심, 부활, 종말, 재림 등의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속적 사건에 대한 송축(頌祝: Doxology :찬양·영광)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의미를 지닌 것이 찬양인 것이며 또한 이런 찬양을 하는 대오(隊伍: ranks)를 ‘찬양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가라고 할 때는 종교음악적 관점에서 타종교에서도 성가라는 말을 쓰고 있다. 예컨데 불교의 찬불가는 불교의 성가가 되는 것이다. 성가대 역시 초기 한국교회에선 사용되지 않던 단어다. 1913년 평양 장대현교회는 한국교회 최초로 ‘찬양대’를 조직했다. 이듬해 새문안교회에 찬양대가 구성됐고 이름을 ‘찬미대’라고 했다. 대부분 학자들은 일본의 영향으로 교회에서 ‘성가’ ‘성가대’라는 말을 쓰게 됐다고 언급한다. 1960년대 한·일 국교 정상화가 본격화된 이후 어떤 경로로, 누구에 의해서인지 단정할 순 없으나, ‘세이카다이(聖歌隊)’라는 말이 그대로 한국교회에 유입돼 성가대라는 말로 통용됐다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하는 인적 조직체를 성가대가 아닌 ‘찬양대’라고 지칭해야 한다.   대부분의 교회가 예배시작 전에 찬송 인도자가 회중 앞에 나가서 예비적 찬송이란 뜻을 담은 ‘준비찬송’ 몇장을 부르겠다는 말로 인도하고 있다. 이는 잘못된 표현이다. 본질적으로 찬송은 어느 곡이든지, 언제 부르든지, 어디서 부르든지 그것은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고 그 분의 영광과 그 분의 섭리와 구속사역을 기리는 것이므로 하나님만이 대상이 되는 것이 찬송인 것이다.   또한 찬송을 사람의 심성 준비에 적용시키는 것은 하나님 중심사상에 어긋나는 것이다. 찬송은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을 찬양하는 중에 그 찬양의 효력은 인간의 심령에 많은 감흥과 영성을 열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찬송은 예배의 요소이지, 심리적 요법이거나 인간의 수양적 방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찬양대의 찬양이 있은 후 교인들이 찬양대를 향해 박수를 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는 절대적으로 금해야 할 사항이다. 찬양대는 교인들을 대표해서 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이므로 아름다운 곡조에 감흥되어 박수를 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내가 서게 되는 배은망덕한 행위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찬양대의 찬양이 끝나면 회중들은 ‘아멘’으로만 화답함이 정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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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14, 2022 ‘중보기도’는 ‘도고’라고 해야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한국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마다 중보기도팀이 있고 중보기도에 열심이다. 그런데 이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과연 올바른 것일까?   ▲ 중보의 의미 중보는 중재를 의미한다. 즉, 두 사람 사이에 개입해서 서로 화해시키거나 관계를 유지시켜주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는 중보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온다(사 38:14. 갈 3:19, 3:30. 딤전 2:5, 히 8:6, 9:15, 12:24). 성경에서의 중보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가 되시는 것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화목 제물로 드리셨다(롬 3:25). 화목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 하나님과 인간은 화목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중보자가 되셨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님 이외에는 누구도 중보자가 될 수 없다. 구약시대에는 천사, 모세, 선지자가 중보 역할을 했지만, 예수님이 오신 후로는 오직 예수님만이 중보가 되신다(딤전 2:5).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지 않는 기도는 하나님께 전달되지 않는다. 반드시 예수님을 거쳐야만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담을 허무셨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간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예수님이 중보로 계신다.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중보기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중보기도자는 오직 예수님뿐이시다.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신다. 따라서 ‘중보기도’라는 용어는 사람에게 붙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도고’란 무엇인가‘도고’라는 단어는 성경에 단 한 번 나온다(딤전 2:1). 도고는 헬라어로 ‘엔튜크세이스’인데, 이는 ‘타인을 위한 기도’ 혹은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자유롭고도 친밀한 기도’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도고는 ‘타인을 위해 하는 기도’를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하기에 적절하다. 우리가 말하는 ‘중보기도’는 타인을 위한 기도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과 기도 대상자를 중재하려는 기도가 아니라 그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뜻이다. 그 사람의 형편과 사정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며, 그 사람을 보호하시고 복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비는 것이다. 이는 중보자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위한 기도를 ‘중보기도’라 하는 것은 적절치 않으며 ‘도고’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출처 : 기독신문(http://www.kido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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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11, 2022 [차별금지법 바로알기 아카데미] 3/11(금) 오후 2시_김지연 교수(미주장신 영남신대 신대원)
    제64회 차별금지법바로알기아카데미 실시간 방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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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08, 2022 대속죄일의 염소 두 마리
    유대력(종교력)으로 7월 10일(태양력으로 9월 중순쯤)이 대속죄일이다. 이스라엘의 절기가운데 가장 큰 절기로 불려진다. 왜냐하면 이 날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죄가 용서함받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날만큼은 속죄제사를 드릴 대 선택되는 희생양이 두 마리이다. 그것도 양이 아닌 염소 두 마리를 선택한다. 한 마리는 속죄제사를 위해, 또 다른 한 마리는 광야에 버리기 위해 선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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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08, 2022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기도의 중보자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은 아무도 자신의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면전(面前)에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 공포와 수치를 덜어주기 위해 우리에게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언자(代言者)와 중보자(仲保者)로 보내시어 우리가 그의 인도하심을 받아 안전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경우 하나님과 아들은 하나이시므로 아들의 중보를 거절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지극한 위엄(威嚴)을 생각할 때 경악으로 몸을 떨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중보자로 나서서 두려움의 영광의 보좌를 은혜의 보좌로 바꾸어주시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의 비천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히 4:16) 나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허락된 유일한 길과 통로는 오직 그리스도이시므로(요 14:6)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른 길이나 통로가 없습니다. 더욱이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요 지도자로 인(印)을 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며 그의 중보를 통해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딤전 2:5)라고 불리웁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만이 바른 기도의 어머니이며 죽은 성자들에게 기도하는 것은 명백한 신성모독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칼빈의 이같은 가르침이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중략) 오직 하나님 편에서 자원하여 베풀어 주시는 은혜로서만 하나님을 창조주로 순종할 수 있으며,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은 우리의 죄악됨과 그 죄악성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너무 멀어서 중보자 없이는 하나님 앞으로 우리가 나아갈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중보자 되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다음 주에 계속)   *위의 글은 인터넷 월간지 ‘월간개혁신앙’에 실린 글을 교우들의 신학정립을 위해 발췌 및 전문 수정 정리한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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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March 04, 2022 좋은 믿음과 잘못된 믿음 구별법ㅣ인지오류ㅣ이정훈교수의 별다방
    좋은 믿음과 잘못된 믿음 구별법ㅣ인지오류ㅣ이정훈교수의 별다방Youtube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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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February 24, 2022 창조? 진화? 이재만 선교사 강의 (1) - 기원에 관한 질문
    미국 창조과학회 이재만 선교사님의 목표사랑의교회 집회 첫 번째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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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비도제일장로교회February 22, 2022 [내래 3분 설교] 복음 전하는 자의 삶 / 최 광 목사
    황금종교회(탈북자 교회) 담임목회를 하고 계시는 최 광 목사(선교사)님의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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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22, 2022 성소와 지성소 사이
    성소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성소와 지성소이다. 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휘장이라고 부른다. 이 휘장에는 독특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바로 그룹(Cherub)이라는 천사의 모양인데, 휘장에 정교하게 그룹이 수놓아져 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창세기 3장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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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14, 2022 피제사란 무엇인가?
    하나님께 드리는 피제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충족시켜주는 원리가 피제사 속에 담겨 있다. 마땅히 죽음을 당해야 할 사람이 동물의 죽음과 그에 따른 피제사를 통해 죄와 부정에서 구원받을 수 있었다. 피제사를 통한 속죄의 원리는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레위기의 피제사가 죄인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반복적 행위인 점에 비해 십자가상의 제사는 적용 범위가 무제한이고 반복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속죄를 자신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구약의 제사처럼 개인의 믿음과 회개를 통한 응답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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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14, 2022 기독교강요를 통해 본 칼빈의 기도론(2)
    (2) 기도의 목적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이 기도를 명하신 것은 그분을 위해 서가 아니고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약해지거나 태만해지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열의가 우리 마음속에서 불일 듯 하며,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소원을 온전하게 아뢰고,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은혜를 주실 때에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받고, 그의 인자하심을 더욱 열심히 묵상하며, 더욱 큰 기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들이고, 그의 섭리를 확신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믿음이 성장하고 이 땅에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있습니다.   2. 기도와 삼위일체 하나님   기도에 있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할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시는 분(hearer and answerer)이시고, 성자 하나님은 우리 기도의 중보자(mediator)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활성화시키는 분(activator)이시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1)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며 응답하신다.   사람이 자기의 무력함을 인식하고 또한 복음의 약속을 듣고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때 사람의 심령을 살피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필요를 아시고 응답하십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준비가 항상 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칼빈은 시편 65편을 주해하면서 “기도의 응답은 하나님이 경우에 따라서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의 항존적(恒存的) 요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듣지 않으시면 곧 자신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고 말합니다. 끈질긴 과부의 비유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기도에 의하여 지치게 되시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끝까지 고집하며 기도할 때에 하나님은 응락(應諾)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속성이 선하시기 때문에 “우리의 기도와 간구에 따라 자신을 크게 제한하여 그 기도와 간구로 말미암아 방해를 받아 진노를 삼가시고 때로는 모든 것을 멸하고자 하실 경우에도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우리 자신을 낮추면 그가 마음을 바꾸시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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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07, 2022 거룩과 정결, 그리고 부정이란?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거룩하게 창조하셨을까? 아니면 정결하게 창조하셨을까? 그것도 아니면 부정하게 창조하셨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생각해 보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오늘날 신자들이 거룩과 정결, 그리고 부정의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에서 탈(?)이 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과연 거룩과 정결, 그리고 부정이란 무슨 의미일까? 아담과 하와가 최초 창조되었을 때는 거룩하게 창조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부정하게 창조되지도 않았다. 아담과 하와는 정결한 상태로 창조되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임무는 그 정결함을 그대로 유지하므로 영생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그들에게는 정결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의도적으로 그 ‘정결’을 파괴(반역)하므로 스스로 ‘부정’케 된 것이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망(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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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랜도바른믿음교회February 07, 2022 ‘기독교강요를 통해 본 칼빈의 기도론(1)’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를 섬김에 있어 일상생활에서 겪게 되는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 가운데 믿음으로 살고자 할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섭리 아래 기도와 믿음과 그리고 말씀으로 살게 되어 있다고 칼빈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자들에게 있어 기도와 믿음, 하나님의 말씀은 그 리스도인의 생활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기도의 동기가 부여되고 기도의 틀이 형성되며 기도는 또한 첫째가는 믿음의 실천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1. 기도의 정의   (1) 기도의 본질: 칼빈에 의하면 기도는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택을 매일 받는 믿음의 으뜸가는 실천이라고 말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있는 으뜸가는 특권이 기도이며 기도를 ‘믿음의 영속적 훈련’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의 심령 속에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 있으면 기도가 저절로 즉시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고 강조합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의 믿음은 복음이 우리에게 약속해 준 보화들을 캐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살아있는 믿음의 표현이요,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필요를 말로 알리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여기서 칼빈이 말하는 믿음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부성적 은총과 돌보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의미합니다.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약속의 진리에 기초하여 성령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계시되고 확증됩니다. 그러기에 그가 말하는 믿음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요, 둘째, 그리스도의 약속을 우리 마음에 계시하는 방편이며, 셋째, 그 약속의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인(印)쳐진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는 하나님의 부성애(父性愛)와 선하심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 의해서 고취됩니다. 그러므로 참되고 순수한 기도는 단지 목소리만 높이면 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의 내적 원리로부터 우리의 간구들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는 신앙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하심에 대한 회개와 믿음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용서를 확신하고 그의 용서의 사랑에 온전히 붙들린바 되었기 때문에 용서를 확신하고 용서를 비는 기도를 믿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의 용서의 긍휼에 근거해야 합니다. (다음 주에 계속)   *위의 글은 인터넷 월간지 ‘월간개혁신앙’에 실린 글을 교우들의 신학정립을 위해 발췌 및 전문 수정 정리한 것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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